카사노바와 에스프레소
카사노바와 에스프레소
나만의 아주 특별한 여행 | 첫 번째 이야기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
여행을 갈 때 내가 늘 고민하는 건
“이 여행이 끝나고 나한테 기억에 남을 추억이 생길까?“라는 것이다.
그래서 난 항상 여행 중에 남들이 하지 않을 만한 행동을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조금 엉뚱하더라도, 그게 나만의 추억을 만들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20년 전쯤, 단체 여행으로 베니스에 간 적이 있었다.
가이드가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을 소개해줬다.
카사노바가 여자를 꼬셨다는 그 유명한 카페라면서 꼭 한 번 커피를 마셔 보라고 권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이었다.
카페 플로리안 주변으로 비슷하게 생긴 카페들이 엄청 많았는데,
플로리안은 가격이 몇 배는 더 비쌌다.
같이 갔던 단체 관광객들은 다들 비싸다고 사진만 찍고 옆에 있는 싼 카페로 들어가거나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난 생각했다.
‘이곳을 평생 잊지 못할 장소로 만들어야겠다‘라고.
“내가 카사노바가 여자를 꼬셨다는 그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면,
그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지 않을까?”
물론 정말 평생남을 추억이 될지 금방 잊혀질 지 모르는 선택이었지만
난 감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여행을 같이 갔던 언니랑 조카한테도 말했다.
“우리 그냥 여기서 커피 한 잔 하자.
사진만 찍고 가는 건 너무 아깝잖아.
이게 나중에 우리한테 특별한 추억이 될지 누가 알겠어?”
우리는 그렇게 셋이 그 비싸다는 카페로 들어갔다.
기다림도, 차별도, 웃음으로 넘기다
카페 안은 정말 멋있었다.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정말 딱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그런 장면이었다.
우리는 밖이 보이는 창가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웨이터는 분명히 우리를 보았음에도 한참을 오지 않았다.
너무 비싼 카페여서 그런 건지 손님도 거의 없었지만,
우리만 이상하게 방치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아시아인이라서 차별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하고 일어나긴 싫었다.
나는 언니한테 말했다.
“뭐, 오든 말든 어때. 더 잘됐네.
커피값 아꼈다 치고 여기 앉아 있었다는 걸로 만족하자.
주문을 안받는 것도 추억이 될 것같지 않아?”
우리 셋은 그렇게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테이블에 앉아 한참 동안 수다를 떨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나갈 것 같지 않았는지 한참을 못본척 하던 웨이터가 결국 메뉴판을 들고 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문하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의 위대한 추억
나는 여유롭게 메뉴판을 열어보다가 또 한 번 놀랐다.
음료 가격이 어마어마했던 거다.
정말 주변 카페보다 몇 배는 비쌌다.
난 사람들이 왜 안 들어오는지 그제야 알았다.
메뉴판 가격에 난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척 난 여유롭게 메뉴를 쭉 훑어본 후에 가장 저렴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켰다.
세명이 앉아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킨 것이다.
1인 1메뉴가 상식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 어이없고 챙피한 행동이었지만,
그땐 가격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생각 없이 가장 싼 커피를 한잔만 시켰다.
그리고 사실,
당시엔 에스프레소가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
그냥 블랙커피 중 한 종류로, 양은 아메리카노 정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웨이터는 아주 작은 잔 하나를 우리 앞에 놓고 갔다.
너무 어이없는 정말 귀여운 크기의 에스프레소였다.
우리 셋은 그 작은 잔을 보면서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이게 커피라고? 양이 이게 다야?”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그래, 이게 플로리안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매력이겠지.’
에스프레소의 양은 원래 그렇게 적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작고 귀여운 에스프레소 잔을 가운데 놓고 돌아가며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그것이 내 인생에 처음으로 맛보는 에스프레소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난 그렇게 맛있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그 커피가 정말로 최고였는지는 모르겠다.
분위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그 비싼 가격이 만들어준 심리적인 효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셋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놓고 떠들고 웃으면서 만든
그 시간이,
그 웨이터가,
그 카페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는 거다.
기억에 남는 선택의 가치
그날 카페 플로리안에서의 커피 한 잔은 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만약 그때 “비싸니까 안 마셔”라고 했다면, 이 특별한 추억은 없었을 거다.
여행에서 가끔은 비합리적인 선택, 조금은 사치스러운 선택이 더 큰 추억을 남겨준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카페 플로리안의 커피를 마신 걸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겐 평생 잊지 못할 한 페이지가 되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진이나 가격표가 아니라 그 순간을 얼마나 특별하게 만드는지가 아닐까.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된다면,
나는 다시 베니스에 가서 플로리안 카페에 들어가 창밖으로 산 마르코 광장을 바라보며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보고 싶다.
물론 이번에는 1인 1메뉴로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때 그 에스프레소 맛이 날까?
© Glor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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